“지금 현재, 나는 푸틴 대통령이 결심을 했다고 확신합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공언했다. 우크라이나 국경에 밀집한 러시아 군대가 조만간 공격을 시작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한 시점이었다. 구체적인 날짜와 작전계획까지 떠돌고 있었다. 드디어 18일, 바이든 대통령이 푸틴의 ‘결심’을 언급했다. “러시아 군대가 몇 주 안에, 며칠 안에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계획과 의도를 가지고 있다.”
푸틴은 왜 이러는 것일까? 바이든은 왜 이런 걸 다 공개하는 걸까? 한반도와 동아시아는 괜찮은 것인가?
푸틴의 행보는 위험하다. 인근 국가의 국경에 10만이 넘는 군사력을 집결시켜 놓고 위협적인 훈련을 진행하는 것은 도발적이다. 이 와중에 흑해함대 등을 동원해 핵전력 훈련을 진행하고, 푸틴은 크렘린궁 상황실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함께 이 훈련을 지켜보는 모습을 공개했다. ‘마침맞게’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정부군과 반군 간 교전이 격화하면서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기도 하다. 무슨 이유가 됐든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진공한다면 영토와 국경에 대한 국제법과 질서를 위반하는 폭거가 될 것이다.
아무리 엄중하게 경고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에 하나 침공한다면 러시아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
그러나 푸틴이 과연 그런 ‘결심’을 했는지, 러시아가 그런 결심을 집행할지는 아직 모른다. 지금 그냥 앉아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푸틴이 왜 이런 행보를 보이는 것인지 냉철하게 분석하여 ‘대증요법’이 아닌 근본적인 ‘치료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많은 분석가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푸틴의 위험한 행보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푸틴의 정치적 야망,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각각의 국내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특수한 관계’, 우크라이나 내부의 러시아계 소수민족, 키예프 협정의 불완전한 집행 등 복잡다기한 이유들이 얽혀 있다. 얽히고설킨 이유들이 지금의 위기로 기화된 데에는 구조적 폭력이 작동하고 있다.
러시아의 군사력이 우크라이나를 압도하고 남는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구조적 폭력이다. 러시아의 국방비만 보더라도 우크라이나의 10배가 넘는다.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라는 군사동맹에 가입하겠다는 “꿈”을 꾸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나아가 시야를 전세계적으로 확대하면 더 큰 구조적 폭력이 있다. 미국과 나토의 군사력은 러시아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미국의 국방비는 러시아의 12배가 넘는다. 나토 가맹국 중 영국, 독일, 프랑스의 국방비만 합쳐도 러시아의 3배에 근접한다. 러시아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핵무기가 있지만, 이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미사일방어체계가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구축되고 있고 모스크바를 몇 분 안에 타격할 수 있는 중거리미사일들이 러시아 인근에 배치되려고 한다. 러시아는 유럽의 ‘우크라이나’다.
해서 푸틴은 ‘판’을 흔드는 것이다. 그래도 30여년 전보다는 힘을 회복했으니 이제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힘을 써서라도 러시아의 불만을 공개하고, 이 구조적 폭력을 조금이라도 조정하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부산을 떨고 있지만 미국과 나토에 협상안을 제시해서 현상변경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미국은 ‘판’을 바꿀 생각이 없다. 지금의 구조는 미국이 많은 자원을 투자해 구축한 것이고, 그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직은 힘으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판을 흔드는 러시아는 ‘도발적’인 세력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을 부각시키면 시킬수록 러시아의 구조적 폭력은 조명을 받고 미국의 구조적 폭력은 그 그림자에 가려진다.
이번 우크라이나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은 세계에서 권력전이 시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판’을 흔드는 세력과 ‘판’을 지키려는 세력 사이의 경쟁과 갈등은 우크라이나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고 며칠 또는 몇 주 안에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동아시아에는 대만해협, 남중국해, 한반도 등이 권력전이 경쟁의 약한 고리로 남아 있다. 약한 고리를 뚫고 화산이 분화하듯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해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역사적 질문을 던진다. 이 혼란의 분출기에 분화하는 활화산이 될 것인가?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 낼 것인가? 한반도는 적어도 1919년 3·1운동 때부터 현대성의 모순과 씨름해오고 있다. 이제 한반도는 다시, 익숙한 미래와 경험하지 못한 개벽의 갈림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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