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로드먼과 도널드 그레그
언론학중앙정보국(CIA)과 미국프로농구(NBA)에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 온 두 미국인이 엉뚱한 곳에서 접점을 찾고 있다. 바로 북한이다. CIA 서울지부장과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와 프로농구 명예의 전당에 오른 로드먼은 수시로 북한의 초청을 받는 보기 드문 미국인들. 그레그는 김정일, 로드먼은 김정은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핵 때문에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가교 역할을 자임한다. 그러나 실제론 김 부자(父子)를 위한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다.
로드먼은 김정은을 “사랑하는 친구”라고 부른다. 그는 “NBA 역사상 가장 리바운드를 잘 잡는 포워드”라고 기록될 정도로 뛰어났던 선수. 그러나 싸움, 자살 시도 등 경기장 안팎에서 숱한 사고를 일으키고 기행을 일삼았다. 은퇴 후 이혼 자녀 양육비가 80만 달러나 밀려 법정에 섰다. 지금도 알코올의존증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그런 로드먼이 김정은을 몇 번 만나면서 “적대적인 미국과 북한 사이의 얼음을 깨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자신은 1972년 미중 수교의 물꼬를 튼 ‘핑퐁 외교’에 버금가는 ‘농구 외교’를 펼치고 있다는 것. 그는 짐짓 “오바마가 할 일이 왜 나에게 떨어졌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다음 노벨 평화상의 유력 후보 3명 안에 내가 들지 못하면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큰소리치기도 한다.
한 언론인은 “원 세상에! 노벨 평화상 수상자 모두 어떻게 선정되었는지 의문투성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대체로 이해할 만한 뭔가를 이뤘다. 하지만 로드먼이 한 것은 북한이 유명한 농구 선수 한 명을 받아들인 것을 세계가 알도록 한 것뿐”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로드먼은 올 1월 평양에서 은퇴 NBA 선수들이 참가한 농구경기를 벌였다. 김정은을 위한 생일선물. 그동안 미국에서는 로드먼이 평양을 오가는 것을 거저 해프닝 정도로 치부하던 분위기였다. 하지만 김정은이 장성택을 처형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로드먼이 이런 일을 벌이자 “파렴치하고 기괴한 짓”이라는 비판이 들끓었다. 로드먼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정은을 감싸며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는 그가 저지른 죄 때문에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고 말하자 미국인들은 격노했다. 급기야 로드먼은 술에 취해 실수했다고 사과했다.
그레그는 이런 로드먼을 “이상하지만 근사하고 똑똑한 운동선수”라며 그의 방북 활동을 높이 평가한다. 국제무대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레그가 로드먼이 국가 간 외교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레그는 10일부터 나흘간 평양을 방문했다. 그는 “북한은 미국의 B-52 폭격기 출격에 화가 나 케네스 배를 노동교화소에 다시 보냈다”고 말했다. 늘 미국을 핑계 대며 어떤 행동도 정당화하는 북한을 그대로 대변했다. 북한은 대화를 원하나 미국이 위협하고 홀대하기 때문에 두 나라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고 핵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줄기찬 자신의 주장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레그는 김정일을 만난 뒤 “그는 아주 똑똑하다. 북한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핵 실험 직후에도 “김정일은 생존을 위해 핵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변호했다. 김정은에 대한 그의 애정은 로드먼 못지않다. “김정은은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 외국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안다. 아마 북한을 더 서구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그의 미래를 낙관했다. 또 “서울이나 워싱턴의 비판자들은 김정은을 으레 악마로 만들고 있다”고 옹호했다.
하지만 그레그가 스스로 밝힌 자신의 신념이나 한국에서의 업적을 보면 김정일이나 김정은을 감싸기는커녕 그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야 마땅해 보인다.
그는 CIA 서울 책임자 시절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정권의 2인자였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해임토록 했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 조사 과정에서 숨진 것이 고문과 관련되었다는 정보에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절대로 한국 정부에 그 문제를 언급하지 말라는 CIA 국장의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최 교수 일에 항의하고, 그것을 계기로 고문으로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가 많이 개선되었다는 것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만큼 고문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국을 불신한 박 대통령이 핵 개발을 지시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본국에 보고해 그 계획을 단념토록 했다는 것에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싫어한 것은 핵을 개발하려 한 독재자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레그는 “모든 강력한 지도자에게는 나쁜 뉴스를 보고하는 장관이 필요하다”는 말을 박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도 한다.
그런 그가 정치범수용소 등에서 벌어지는 북한의 고문에 대해 김정일에게는 무슨 항의를 했는가. 고문 정도가 아니라 장성택과 그 일파를 순식간에 처형해 버리는 김정은에 대해서는 어떤 항의를 전달했는가. 미국을 불신해 핵을 개발했다는 김정일에게 핵을 포기하라고 권유한 적이 있는가.
남한의 고문 등 인권 상황을 걱정, 비판하고 핵 개발을 우려하던 그레그는 과거 그의 신념과는 달리 북한의 인권과 처형, 핵에는 한마디 못하고 북한 주장만 대변하고 있을 따름이다. 북한을 보듬기 위해 기행의 농구선수 로드먼과도 어우러지는 그의 처지가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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