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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같이 갑시다

충격과 경악의 순간이다. 1882년 한·미관계 성립 이후 미국 정부 최고위급 인사에 대한 가공할 만한 칼부림이라니. 한마디로 엽기적, 저돌적 망동이다. 6·25 전쟁 때에도 일어나지 않았던 엄청난 일로 너무나 불행한 사건이다. 더구나 비무장 상태의 외교관을 상대로 칼을 휘둘렀다고 하니 어떤 말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주한 미대사의 완쾌와 조속한 업무복귀를 기원하며 깊은 위로의 말을 전한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매우 잘못된 장소와 시간대에 일어나고 말았다. 그 조찬 모임은 보수와 진보 인사를 망라한 민족 화해협력을 위한 범국민기구가 주최하고, 갓 부임한 미국대사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 한·미관계의 발전 방향을 강연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가해자는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걷어차버린 것이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이 돌발 사태를 그냥 방치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마치 고여 있는 저수지 물이 썩듯 우리 사회가 불통과 오판으로 치닫고 있으며 끝내 이런 극단주의로 비화될 조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범죄 혐의자는 ‘전쟁 반대’와 ‘한·미 군사훈련 중단’이라는 자기 주장의 관철을 위해 이처럼 무모하기 짝이 없는 위험한 행동을 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에도 맹목적 극단주의가 출현해 돌출행동을 불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평화와 공존은 증오나 대립의 물리적 수단과 방법으로는 존립할 수 없다.

극단주의는 민족주의에서는 쇼비니즘, 종교적으로는 광신적 이단, 피부색으로는 배타적 인종주의, 정치적으로는 유별난 독단과 독선의 정치사상과 과격한 이념을 씨앗으로 삼아 언로가 막혀 있는 사회에서 발호한다. 그러므로 신생 극단주의자는 어떤 성격장애자 개인의 몫이 아니라 다수 대중 안에서 그것을 선호하는 소수의 언동을 통해 재생산된다. 다수 안에서 잠복된 폭력충동과 파괴본능을 자극함으로써 극단주의는 인간사의 상대성과 다양성, 유한성을 완강히 거부하고, 오로지 일방적으로 자기들의 세상에 집착한다. 극단주의가 현대사회에서 출현, 기생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그만큼 외롭고, 버려진 주변성의 질곡이 극한의 공포와 공격성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극단주의를 극복, 해결하는 길은 그 반사회적 요소나 사회악을 물리적으로 배척하기보다는 사태의 심연에 침잠해 있는 정치적 거악부터 척결하는 게 우선순위이다. 왜곡되고 변형된 소수의 관점과 시선으로부터 시작되어 일부 사회로 유입·확산됐던 사회적 폭포현상부터 해명·분석돼야 한다.

한국에서 반미·반전주의가 어째서 파괴적인 테러리즘으로 비화하고 말았는가? 한국의 극단주의는 망상과 아집만으로 현상유지적 외교관계를 부정하고,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일방주의적으로 재단함으로써 하나를 취하되 다른 하나를 버리는 것에 대한 아무런 검토를 하지 않는 주관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온건하고 평화적 접근을 배제하고, 더욱 폐쇄적이고 경직된 방향으로만 치닫고 있는 극단을 방치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나서 극단주의를 치유하려면 견제와 균형을 회복하려는 꾸준하고 차분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 틈을 타서 누군가 공포의 정보정치로 회귀하며 사회 진화에 역행하는 구시대적 반동의 유혹에 빠진다면 극단주의라는 기름에 불장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한·미관계는 광복 이후 이와 같은 극단주의 행태를 하나의 변곡점으로 삼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입해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입원 중인 미 대사는 트위터를 통해 우리 ‘같이 갑시다’라고 제안했다. 이 말 한마디는 더욱 튼튼하고 건전한 내용의 새로운 한·미관계로의 도약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 사회의 분별없는 폭력성을 치유하려면 극단주의를 낳는 소모적 진영논리 강요와 정쟁을 해체해야 한다. 이제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수용하자. 사회통합의 절박함을 받아들이자. 이것들이야말로 극단주의가 움트고 있는 지반을 정리하는 수습의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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