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 샌더스의 정치 혁명.’ 한글로 옮겨진 샌더스의 자서전 표제처럼 실제로 미국의 젊은 세대는 대선에 도전하고 나선 그를 뜨겁게 맞이했다. 샌더스 열풍은 국내외 언론들이 ‘월가 점령시위’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며 냉소했던 보도와 논평이 얼마나 섣부른 단견인가를 싱그럽게 입증해주었다.
물론, 샌더스나 그와 정치이념이 어금버금한 정치인이 단숨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될 수는 없을 터다. 최근 열린 예비경선에서 샌더스가 패배함으로써 민주당 후보는 힐러리로 사실상 확정됐다.
하지만 예비경선 승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샌더스가 일으킨 뜨거운 바람이다. 미국 정치는 이미 전환점을 맞았다는 분석들이 미국 언론에 솔솔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 나는 ‘샌더스 열풍’을 독자와 나누고 싶지 않다. 샌더스를 경시하거나, 그의 경쟁상대인 힐러리에 공감해서가 아니다. 명색이 ‘정치 커뮤니케이션’을 강의하는 학자로서 한국 현실에 눈감고 담론을 펼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흔히 한국의 정치 커뮤니케이션은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이 서로 정권을 주고받아온 유럽과 달리 보수양당 체제인 미국식 모델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유럽은 물론, 미국과도 큰 차이가 있다.
차분히 짚어보자. 만약 노동절을 맞아 한국의 어느 대통령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많은 권리는 노동조합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국민에게 노조 가입을 권유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 대통령에게 조·중·동 신방복합체와 3대 방송이 어떤 ‘저주’를 퍼부을지 우리 모두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명박과 박근혜는 물론, 고 김대중과 노무현도 감히 그런 연설을 못하거나 안 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무람없이 노조 가입을 권하고 나섰다. 오바마는 ‘종북’이나 ‘좌파’일까. 전혀 아니다. 노동운동이 민주주의를 성숙시켜왔다는 명제는 특정 관점이 아니다. 세계사적 진실이다.
비단 오바마에 그치지 않는다. “노조가 강했을 때 미국도 강했다.” 누구의 말일까. 힐러리가 노동정책을 공약하며 공언한 말이다.
힐러리는 기업 경영에 노조의 발언권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구나 ‘이익 공유제’도 약속했다. 힐러리의 경제정책을 자문하고 있는 전 재무장관 서머스는 기업들의 이익을 골고루 분배하려면 노조의 교섭권이 커져야 한다며 그것을 ‘빈부격차 완화정책’으로 제시했다.
심지어 국내 언론에 마치 ‘망나니’처럼 보도되는 공화당 예비후보 트럼프까지 ‘금융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고 선포했다.
미국 정치의 변화는 2008년 월가의 탐욕으로 빚어진 세계경제 침체와 맞닿아 있다. 종래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는 장기 침체를 이겨낼 수 없다는 성찰도 담겨 있다. 한국 경제는 미국보다 더 가라앉고 있다. 여북하면 적잖은 대학생들이 ‘대한망국’이라는 말에 공감하겠는가.
하지만 ‘좌향좌’하고 있는 미국 정치와 달리 한국 정치는 ‘우향우’하고 있다. 20대 총선에서 국민의 매서운 심판을 받고도 내놓고 딴전 부리는 대통령 박근혜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총선에서 예상 밖 의석을 확보해서일까. 잔뜩 목에 힘을 준 더민주 김종인과 국민의당 안철수를 보라. 집권 시기에 진보정책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 더민주 세력을 ‘운동권 정당’이나 ‘이념 정당’ 따위로 몰아치는 데 두 사람은 전혀 차이가 없다.
민주화운동 경험이나 ‘이념’이 없는 김종인과 안철수는 그렇다고 치자. 학생운동과 시민운동, 노동운동을 해온 국회의원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조차 마치 ‘운동’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듯 ‘조·중·동’을 의식하는 언행은 씁쓸하다. 묻고 싶다.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을 해온 샌더스가 자신의 ‘문법’을 바꿨던가? 샌더스가 부담스럽다면, 힐러리를 보라. 과연 지금 힐러리가 대선 정국에서 공약한 정도의 정책을 내년 대선에서 약속할 정치인이 우리 정치판에 있는가?
한국 정치의 퇴행은 미디어 현실과 맞닿아 있다. 여론 독과점 매체들이 틈만 나면 노동조합을 ‘귀족’이니 기득권이니 살천스레 몰아쳐왔다. 하지만 모든 원인을 미디어에서만 찾아도 좋을까. 아니다.
말끝마다 민생을 부르대는 정치인, 특히 학생운동, 시민운동, 노동운동을 경력으로 국회에 들어간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때가 아닐까. 그들에게 굳이 샌더스를 들먹이고 싶지 않다. 오바마를, 힐러리를 보라고 글을 쓰는 내가 차라리 모멸스럽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아간 이들이 사무치기에 더 그렇다.
샌더스 열풍에 부러움을 느끼는 한국의 뜻있는 유권자들에게 우리는 ‘힐러리’조차 꿈꿀 수 없는 나라 아닌가를 묻는 이유는 자조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정반대다. 힐러리를, 아니, ‘샌더스’를 만들어내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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