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신 접종률이 높은 워싱턴DC에서는 요즘 조금씩 대면 행사들이 재개되기 시작했다. 이런 현장을 다니면서 절감하는 것은 이제 외교·안보 담론의 핵심은 과학·기술이란 사실이다. 한미동맹재단이 28일(현지 시각) 개최한 ‘한·미 동맹 평화 콘퍼런스’에서 마크 램버트 신임 국무부 한국·일본 담당 부차관보는 “디지털 경제, 퀀텀 과학, 인공지능, 우주 탐험” 등을 새로운 한·미 협력의 영역으로 꼽았다.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이 지난 21일 연 ‘한·미 민관합동 경제포럼’에서는 최종문 외교부 차관과 마샤 버니켓 국무부 경제성장·에너지·환경 담당 차관대행이 한목소리로 인공지능, 5·6세대 이동통신(5G·6G),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같은 첨단 기술 협력을 강조했다. 뻔한 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미국 분위기는 정말 심각하다.
미국의 긴박감을 절감한 계기는 지난 13일 미 인공지능 국가안보위원회(NSCAI)가 개최한 ‘글로벌 신기술 서밋’이었다.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부 장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모두 현장에 나타나 연설했다. 동맹·우방국 고위 인사들을 초청해 놓고 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 3인방이 총출동해 중국이 주도하는 권위주의적 질서의 확산을 막으려면 기술 혁신과 동맹을 잇는 안전한 공급망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고 합창했다. 당장 이런 일들을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자유가 없는 세계에서 살게 된다는 디스토피아적 예상이 배경에 깔려 있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것일까. NSCAI가 지난 3월 조 바이든 미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한 인공지능 관련 보고서를 구해서 읽어봤다. 에릭 슈밋 전 구글 최고경영자가 이끄는 자문위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한줄 한줄이 다 비장했다. “미래 전쟁은 알고리즘과 알고리즘의 대결이다.” “적들은 스파이 활동과 공개 정보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인공지능으로 개인, 사회, 핵심 인프라의 취약점을 알아낼 것이다.” “최고의 인간 작전관도 인공지능으로 조율되고 극초음속으로 움직이며 초당 수천 건의 조작이 가능한 여러 기계에 맞서 방어를 해낼 수는 없다.”
가장 와닿은 한 줄은 “미국 정부는 여전히 기계의 속도가 아닌 인간의 속도로 작동한다”는 반성이었다. NSCAI는 정부 조직에 인공지능 같은 최첨단 기술을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 문제라며, 일종의 디지털 사관학교를 만들어 미군 장교를 육성하듯 진지하게 디지털 관료를 육성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강대국 미국이 이토록 고민하는 미래에 한국은 얼마나 대비돼 있나’ 돌아보게 됐다. 반도체와 전기차 배터리 기업들 덕분에 ‘핵심 파트너’ 대접을 받는 지금이 정부의 실력도 고민할 마지막 기회는 아닐까. 미래에 대한 절실한 고민의 결여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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