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현지시각)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임신중지)를 공식적으로 합법화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거의 50년 만에 폐기한 뒤 그 후폭풍이 거세다. 미 대법원이 있는 워싱턴디시(DC)에선 아직도 시위가 그치지 않고 있으며, 여러 주 수도에서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번 판결로 낙태권(임신중지권) 존폐에 관한 권한은 각 주정부와 주의회로 넘겨졌기 때문이다. 미주리, 아칸소, 오클라호마, 텍사스 등에서 낙태금지 입법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미국 전체 주의 절반이 넘는 30개 주에서 낙태가 사실상 금지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낙태에 대한 판단은 사회적, 법적 판단뿐만 아니라 개인의 종교적, 철학적 신념과도 연관돼 있어 찬성과 반대의 잣대를 함부로 들이댈 수 없는 이슈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미국의 최상위 사법기관이자 미국식 민주주의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연방대법원의 판단이 나온 만큼 사회적, 정치적 이슈가 된 것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10일 공중보건비상사태를 선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공중보건서비스법은 심각한 질병 등으로 비상상황이 발생할 경우 보건복지부 장관은 90일 동안 공중보건비상사태를 선포해 대응에 필요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기간을 연장하도록 하고 있다. “정부 내 의료 전문가들에게 내가 (공중보건비상사태를 선포할) 권한이 있는지, 실제 어떤 영향이 있을지 살펴보라고 요청했다”고 밝힌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은 이 이슈를 11월 중간선거 때까지 쟁점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번 판결과 관련해서는 미국 기업들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구글, 아마존, 메타(페이스북) 등 미국의 주요 대기업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며 이번 판결 반대운동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업들은 사회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에 직접 메시지를 내는 데 소극적이었다. 반대 진영의 반발을 사서 ‘불매운동’이라도 벌어지면 기업으로서는 영업에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기업 임직원과 고객, 투자자들은 기업이 주요 사회 이슈에서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특히 주력 소비계층으로 떠오른 소위 엠제트(MZ)세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 맥도널드, 스타벅스 등 미국 대기업들은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데 이어, 러시아 사업 철수를 선언하고 즉각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기후변화에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후원금을 내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이번 ‘로 대 웨이드’ 대법원 판결을 두고서도 마이크로소프트, 디즈니, 애플, 넷플릭스, 우버, 메타, 구글 등 주요 대기업은 즉각 낙태와 관련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직원의 여행경비를 지원하고,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주에서 다른 주로 주거지 이전을 원할 경우 그 비용도 지급하겠다고 선언했다. 다국어 교육 기업 듀오링고는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 주에는 사업 진출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업들이 정치적 권력을 가지지는 않지만, 고용이나 세금 납부를 통해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에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이어 기업이 국가를 구성하는 네번째 거버넌스 조직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기업을 움직이는 주주들이 기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낼 것을 요구하고, 이 목소리가 거버넌스에 반영되는 소위 ‘주주 민주주의’(Shareholder Democracy)가 시작됐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목소리도 나오는 배경이다.
50년 만에 여성의 낙태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미 대법원의 판결은, 기업의 사회적 이슈에 관한 개입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측면에서도 이정표로 기억될지 모른다.
Leave a Reply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