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우방에 ‘핵우산’을 제공하며 ‘핵 확산’을 막아왔다. 핵무기 보다 더 강력한 미국의 힘은 달러에서 나온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미국은 경제 제재로 맞섰다. 힘의 원천은 국제결제 통화인 달러다. 전쟁으로 물가가 급등하자 미국은 달러 가치를 높여 인플레를 다른 나라로 수출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원자재, 식량과 함께 달러 갈증까지 겹쳤다. 달러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들은 미국이 통화스와프 등으로 제공하는 ‘달러 우산’이 절실하다.
19일 방한 한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장관의 첫 행보는 LG화학이었다. 글로벌 2차전지 시장에서 핵심적인 기업이다. 진짜 카운터파트(counterpart)는 추경호 경제부총리지만 앞서 한국은행 총재와 밀담을 나눴고 윤석열 대통령과도 만났다. LG화학에서는 동맹간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을 강조했다. 윤 대통령과는 한미간 경제·금융안보 동맹 의지를 확인했다. 경제부총리에게는 원유 가격상한제 동참을 다짐 받았다.
‘프렌드쇼어링’은 동맹국끼리 안정적인 공급망 체계를 구축하자는 개념이다. 옐런은 중국이 불합리한 시장질서를 도입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대한민국 산업생산 구조가 중국과는 거리를 두고 미국과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뜻이다. 원유 가격상한제는 러시아가 값이 높아진 원유 수출로 막대한 전쟁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어쨌든 옐런은 우리나라에서 플렌드쇼어링과 원유가격상한제 동참을 사실상 약속 받고 돌아갔다.
미국의 외교는 국무부장관 소관이다. 재무부장관이 외교행보를 보인 것은 이례적이다. 옐런 장관은 지난 12일부터 주요 20개국, G20 재무장관회의 참석차 아시아를 순방하면서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를 수용할 것을 각국에 강하게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을 제외하면 굳이 러시아와 ‘척을 지기’ 어려운 아시아 국가들에 미국이 들이댈 수 있는 지렛대는 ‘달러’다.
뻔한 목적의 옐런 방한을 앞두고 우리나라가 기대했던 것도 한미 통화스와프다. 달러 강세에 외국인 자금이탈이 이어지고 있고, 국제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무역수지까지 악화되면서 원화가치가 급락하고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접 피해를 입고 있는 유로화에 버금가는 폭의 평가 절하다. 외환보유가 있지만 달러 인쇄국인 미국과의 통화스와프는 안전장치로서 시장에 주는 의미가 크다.
옐런은 통화스와프를 약속하지 않고 떠났다. 추 부총리와 회담에서 “향후 금융·외환시장의 동향과 협력방안을 논의하자”는 우리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정도에 그쳤다. 엄밀히 한미 통화스와프는 한은과 연방준비제도 간의 계약이다. 재무장관 소관은 아니다. 하지만 달러화 지폐에는 재무장관의 서명이 들어간다. 옐런은 연준 의장까지 역임했다. 제롬 파월과도 함께 근무도 했다. ‘약속’까지는 아니더라도 필요성에 대한 ‘공감’ 정도는 할 수도 있었다. 우리나라가 약속을 지킬 지 향후 행보를 확인할 듯하다.
정치가 경제가 됐다. 경제가 곧 정치다. 물가 급등과 외환위기 우려로 신흥국들의 정치 불안이 심각한 양상이다. 서방과 러시아,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날로 첨예해지고 있다. 원유를 손에 쥔 중동은 각자 제3의 길을 걸으려 한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경제구조를 가진 우리나라로서는 역대급 기로다. 주식시장 반등 여부를 넘어 우리 기업들이 새로운 국제질서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가 중요해졌다.
예전부터 중국의 패자(覇者)들은 유력한 제후들을 불러 모아 실력을 과시하고 새로운 질서를 정비하는 회맹(會盟)을 주관했다. 따르지 않는 제후들은 맹주의 이름으로 응징했다. 사실 G7이나 나토정상회의 등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회의도 일종의 ‘회맹’이다. 요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내치에 여념이 없다. 10월 공산당 당대회에서 장기집권 구도를 완성하면 바깥 일을 챙길 것으로 보인다. 11월 유럽 정상들을 베이징으로 초대한 것은 그 신호다. 마침 미국의 중간 선거 즈음이다. 미국 편에만 서면 어떤 불이익이 있을 지를 분명히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대한 압박도 이 때부터 본격화 될 것으로 보인다. 올 가을 중국이 미국에 반격하는 새로운 경제 전쟁에도 대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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