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웨이브(Red wave·공화당 바람)’는 일어나지 않았다.”
9일(현지 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간선거 결과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한 그는 내년 초 재선 도전도 예고했다. 중간선거를 두고 바이든 대통령의 말처럼 민주당이 선전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초유의 고물가와 바이든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 등으로 확산됐던 비관적 전망이 뒤집힌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내에선 대체적으로 ‘메시지의 힘’을 꼽는 분석이 많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제심판론’ 확산으로 위기에 몰린 민주당이 내놓은 ‘민주주의 위협론’이 막판으로 갈수록 힘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위협론을 처음 선거 전면에 들고나온 이는 바이든 대통령이다. 그는 9월 1일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도널드 트럼프(전 대통령)와 ‘마가(MAGA·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치 슬로건)’ 공화당은 미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단주의”라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지켜 달라”고 했다.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도 “공화당이 전면에 내세운 경제 이슈에 대응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바이든 대통령이 시동을 건 민주주의 위협론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선거 막판 ‘민주당 구하기’에 나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다. 민주당 후보들로부터 지지 유세 외면을 받은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등 격전지 유세에 나선 오바마 전 대통령은 특유의 화법으로 민주주의 위협론을 설득력 있게 호소했다.
하이라이트는 5일 펜실베이니아에서 가진 바이든 대통령과의 합동 유세였다.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유세의 마지막 연설을 맡은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인플레이션이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지금 최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며 고물가에 지친 유권자들의 불만을 인정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중간선거는 어떤 정당에든 어렵지만 민주당은 특히 더 어렵다”며 자신이 대통령이던 2010, 2014년의 쓰라린 패배의 경험을 꺼내기도 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공화당 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 대신 “민주주의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상처를 입는다”며 경제심판론에 가려진 불안감을 끄집어냈다. 공화당을 야유하는 군중들에겐 “야유(boo)하지 말고 투표(vote)하라”며 “삐치고(sulking), 맥 빠져 있는 것(moping)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라고 했다.
성과를 늘어놓는 훈계성 메시지나 상대 당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네거티브 대신 고물가로 시름하는 유권자들에 공감하고,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한 연설은 같은 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연설과는 크게 대비됐다. 같은 날 격전지 펜실베이니아 연설에 나선 트럼프 전 대통령은 새로운 정치 비전을 제시하는 대신 2020년 대선에 대한 ‘빅 라이(선거 부정)’ 주장과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지지층의 열광을 끌어내는 데는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중도층의 마음을 잡기엔 역부족인 메시지다. 결국 선거 승패를 가를 중도층 표심에서 민주당은 공화당을 앞섰다.
최근 이태원 압사 참사 이후 국내 정치권에선 설화가 이어졌다. 책임론을 피해 보려 자식 잃은 부모에게 화살을 돌리거나, 국민적 분노에 편승한 일부 정치인들의 메시지는 분열과 혐오만 불러온다. 국가적 재난에 책임을 지는 모습 대신 말싸움을 벌이는 태도 역시 넓은 공감을 끌어내기 어렵다. 미 중간선거가 보여준 정치의 힘이 국내 정치권에 교훈이 됐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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