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제로(0) 금리는 빈사상태의 경제에 자극을 주기 위한 극약 처방이다. 미국은 유동성 함정을 각오하고 무제한 달러를 찍어내는 양적 완화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다. 우리 경제에 단기적으론 분명한 호재다. 서울 증시는 반등하고 원-달러 환율은 1200원대로 내려왔다. 한국은행이 추가로 금리를 내릴 수 있는 여유 공간도 생겼다. 가계의 이자 부담이 줄어들면 부동산 시장도 안정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극약 처방은 심각한 후유증을 동반한다. 일본도 한때 제로금리와 양적 완화를 시도했지만 3년 동안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자본의 해외 탈출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았다. 문제는 세계 기축통화인 미 달러화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기축통화가 위상을 되찾는 유일한 해법은 이른바 ‘배젓(Bagehot) 처방’이다. 강력한 긴축과 함께 금리를 크게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미국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천문학적인 구제금융을 풀면서 금리도 제로로 낮춘 것이다.
앞으로 상당 기간 미 달러화 가치는 약세를 보일 게 분명하다. 이미 달러화가 세계 주요 통화에 약세로 돌아서면서 기축통화의 권위가 훼손되고 있다. 낮은 금리에다 환차손까지 보면서 누가 달러화 표시자산에 투자하겠는가. 여기에다 달러화는 1971년 금태환 폐지 이후 더 이상 금(金)에 의해 가치를 보장받지 못한다. 기축통화가 흔들리면 세계 경제에 초대형 지각변동이 불가피하다. 한때 세계를 지배한 로마 은화와 영국 파운드화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장기적인 후유증에 대비해야 한다. 중국은 “미 국채 매입을 무한정 지속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일본은 엄청난 엔고(高)에 시달리고 있다. 앞으로 달러 기피현상이 전염되면 달러화 가치는 더 곤두박질하게 된다. 이런 악몽의 시나리오에 대비하려면 경제의 기초체력이 중요하다.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여 경제 체질을 개선하고 금융시스템을 빨리 안정시켜야 한다. 19세기 영국의 파운드화가 불안할 때 독일 마르크화는 흔들리지 않았다. 강력한 제조업과 튼튼한 금융시스템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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