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칼럼] 미·중 협조시대 여는 한·일 관계의 모색
한·일 외교가 정상궤도를 되찾아가는 듯한 기미가 보이고 있다. 수천 년을 숙명적 이웃으로 살아오면서 두 나라 사이에는 수다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함께 풀어가야 할 당면과제가 너무나 많은 중요한 시점이다. 오랜 역사, 특히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오면서 상이한 경험과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 흔히 국제관계의 방정식에선 지정학적 위치가 가장 중요한 상수(常數)라고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깊이 뿌리내린 국민의식을 들 수 있다. 한·일 관계 역시 그러한 국민의식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추진되는 외교 노력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그러한 차이를 충돌이 아닌 조화와 공동이익의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을까를 모색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19세기,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팽창 과정에서 그 압력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것은 한·중·일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에 최대의 과제였다. 그러한 위기상황에서 유독 일본만이 서양문물을 과감히 받아들이고 국가체제를 전면적으로 개조하는 근대화에 성공하였다. 그 여세로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강대국 반열에 오른 일본은 봉건체제의 정체성에 얽매인 한국을 강제병합하고 중국을 침략하며 군국주의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이러한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은 ‘개국(開國)의 패러독스’에 처하였었다는 것이 일본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이다. 서양적 문물과 제도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반면 일본 고유의 전통과 규범은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라는 근대화의 패러독스를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의 타당성은 차치하고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심각한 대외관계의 이중성을 잉태하고 있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개국’을 계기로 19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대외관계는 선진화한 서구와의 경쟁과, 후진성에 갇혀 있는 아시아와의 차별화란 이중구조에 빠져들게 된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빠져나가 서구대열에 끼어드는 이중적 대외관계를 지향하게 된 데에는 일본인의 역사인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중화(中華) 콤플렉스’도 작용했을 것이란 가설을 생각해보게 된다. 지리적으로나 문명사적으로 중국이 천하의 중심으로 받아들여지는 전통에 일본의 지성은 반발할 수 있었다. 진정한 ‘중화’는 확실하게 의(義), 도(道), 이(理)를 터득하고 통치규범으로 받아들인 국가를 뜻한다는, 그리고 일본은 바로 그러한 국가가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을 여지가 생겼던 것이다. 중국을 추월해야 될 대국으로 의식하면서도 후진국으로 경멸해버리는 ‘중화 콤플렉스’가 일본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지는 않았을까.
일본의 ‘중화 콤플렉스’가 낳은 부작용의 하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한반도를 중화권에 속한 부차적 지역으로 여기며 그 독자성을 가볍게 치부한 것이다. 유교를 자체적으로 가다듬어 국가통치의 이념으로 제도화하고 상대적으로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공존하는 사대(事大)의 관행을 개발한 정치나 문화의 독자성을 간과한 것이다. 일본이 군국주의의 물리적 팽창력에 심취하였던 20세기 전반, 한국의 독립운동은 공화·민주·자유주의와 더불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으며 해방을 기다렸다는 것, 전쟁의 패배로 점령군에게 선물 받은 일본의 민주주의와는 달리 냉전과 후발 산업화 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에 성공하였다는 것 등을 상기할 때에 비로소 한·일 간 국민의식의 차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강대국들이 힘을 겨루던 제국주의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막을 내렸고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냉전시대도 끝난 지 4반세기가 되었다. 그러나 국제질서와 평화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패권국가의 역할은 미국의 유일초강대국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21세기에도 상존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란 두 대륙국가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자임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패권적 입장이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아시아는 거대한 재앙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한국은 그 가능성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미·중의 협조관계 조성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다.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며 지난 반세기 소프트파워의 위력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 준 일본이 지구촌의 평화적 발전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아시아의 미래를 위해 미·중 관계가 충돌이 아닌 협조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과거사의 악몽을 씻어버리고 아시아의 새 이웃을 만들어간다는 공동목표를 위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한·일 외교의 새 행로를 함께 모색해야 되겠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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