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아침햇발] 바이든 외교, 샌더스를 주목하라 / 박민희
박민희ㅣ논설위원 Editorial
1월2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가장 주목받은 ‘스타’는 미국 진보 정치를 상징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었다. 정장을 차려 입은 명사들 사이에서 점퍼를 입고 엄지장갑을 낀 채 앉아있는 샌더스 의원 사진은 전세계에서 유행하며 그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줬다.
취임 한달이 지난 바이든 행정부의 중요한 정치 의제는 샌더스 의원을 중심으로 한 진보세력과의 ‘협치’다. 진보진영이 요구해온 시간당 최저임금 15달러(약 1만7천원), 대학생 등록금 대출 탕감 등이 코로나19 대응과 함께 지금 미국의 핵심 이슈다.
진보진영은 재계의 전폭적 후원을 받은 바이든 대통령과 중도세력이 월가·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이해관계에 휩쓸릴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하며 주시하고 있다. 상원 예산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샌더스 의원과 진보진영의 정치적 영향력은 어느 때보다 강하다.
외교안보에서도 이들 진보진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블링컨 국무장관, 인도-태평양 정책을 총괄하는 ‘아시아 차르’ 커트 캠벨 등 오바마 행정부 출신의 주류 외교전문가들이 바이든 외교의 핵심이다. 하지만, 진보진영 출신의 많은 인사들이 외교안보 실무진으로 등용되고 있고, 이들의 요구가 정책에 주요하게 반영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가 ‘오바마 2.0’이 되지 않는 이유다.
진보적 싱크탱크인 미국진보센터의 선임 펠로우였던 멜라니 하트가 국무부에서 대중국 정책 재검토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사샤 베이커 국가안보회의 선임보좌관은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의 외교안보 자문이었고, 무기 감축을 주장해온 진보 인사다. 샌더스의 외교정책 자문 매트 더스도 국무부에 합류할 것이라고 <폴리티코>가 보도했다. 이란 특사로 임명된 롭 말리는 이란과의 대화 복원에 적극적이며,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인도적 행태에 비판적 입장을 보여왔다.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 뒤 최우선 외교 과제로 예멘 내전에 대한 미국 무기 제공을 중단한 것, 예멘 내전을 주도하고 언론인 자말 카쇼기를 잔인하게 암살했던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 등에 진보진영의 요구가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
샌더스 상원의원, 로 칸나 하원의원 등 미국 진보를 대표하는 정치인들은 중국을 “주요한 경제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트럼프의 대중국 관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등 미국 중산층과 노동계층을 무너뜨린 중국의 불공정 경제 관행을 바꾸기 위한 대중국 강경책을 지지한다. 아울러 인권을 핵심 가치로 중시하고, 중국의 신장위구르 강제수용소와 홍콩 국가보안법 강행에 매우 비판적이다. 하지만, 중국과 ‘신냉전’을 벌이는 것은 반대한다. 전세계 미군 주둔과 군사비 지출을 줄이고, 미국이 “영원한 전쟁”에 빠져 있는 상황을 끝내야 한다고 요구한다.
북한에 대해, 샌더스 상원의원은 지난해 9월 외교관계위원회(CFR) 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한 북한과의 외교를 지지하지만 협상은 사진찍기 행사 이상이 되어야 한다”며 “북한의 핵프로그램을 되돌리는 ‘단계적 진전’(step by step process)을 추구하고자 하며, 북한이 핵 프로그램 일부를 해체하는 데 대한 대가로 부분적인 제재 완화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트럼프 행정부가 주장해온 ‘선 비핵화, 후 제재 해제’가 아닌 단계적 비핵화 협상 방안이다. 그는 북핵 협상과 관련해 한국, 중국과의 조율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물론 현실의 다른 한편에는 미국 기업·금융의 막강한 영향력이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대중국 강경 기조를 강조하지만, 미국 기업들의 중국에 대한 투자는 급증하고 있다. 중국도 금융시장 개방으로 미국 월가 금융기업들에 문을 열어 미국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진보진영과 월가의 ‘극과 극’ 요구를 어떻게 조율해갈지에 달려 있다. 미국 또한 중국과의 전면적 탈동조화(디커플링)나 대결로는 나아가기 어렵다. 미국은 첨단기술과 경제력, 국제적 리더십 우위를 유지할 방안을 중국으로부터 최대한 받아내면서도, 협력의 지점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한국 보수진영에서 한국이 중국과 관계를 끊고 미국 편에 신속하게 서야 한다며 매일 닥달하고 있는 것은, 미국조차 그런 길로는 나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무시하는 참으로 무책임한 주장이다. 다만, 바이든팀이 중시하는 ‘미국 경제와 중산층을 살리는 외교’가 미-중 무역과 분업 구조를 상당 부분 바꾸게 될 때, 한국 경제가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한국은 미국 외교정책에서 수십년 만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도 직시해야 한다. 미국 진보진영은 북한과의 협상, 단계적 비핵화 해법에 기존 외교안보 전문가들보다 훨씬 우호적이다. 종전선언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해왔다. 하지만, 북한이나 중국의 인권 문제는 핵심 사안으로 여긴다. 이들은 핵심 동맹인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인권 문제도 거침 없이 비판한다.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이 북한 인권을 거론하기를 꺼리고, 중국의 인권 문제에도 “중국의 내정”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한-미 외교 조율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한국이 인권과 민주의 일관된 원칙을 명확히 한다면, 미국 진보진영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진전에 우군이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당장 미국 편에 서지 않으면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는 호들갑도, 미국과 잘 조율 중이라는 호언장담도 아니다. 변화에 대한 면밀한 판단, 그에 걸맞는 정확한 외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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