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강대국들에게 국제정치란 거대한 장기판에서 말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큰 그림 속에 작은 나라 속사정은 없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사지나 다름없는 탈레반 치하에 남겨두고 황망히 철군해버렸을 때도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까칠한, 그러나 중요한 동맹국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최근 바이든 정부가 영국, 호주와 함께 3국 안보협력체인 ‘오커스(AUKUS)’를 창설한 후 미·영이 힘을 합해 호주의 핵 잠수함 선단 창단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누구도 중국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오커스가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새로운 안보 네트워크라는 걸 모를 수가 없다.
미국은 1958년 영국에 핵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원자력 추진 기술을 이전한 이후 한번도 이 기술을 다른 나라에 이전한 일이 없었다. 한국도 그토록 원했지만 전례가 없다며 거절당했다. 그런데 바이든이 호주에 기술이전을 서두르겠다고 하자 국제사회가 다 놀랐다. 프랑스는 완전히 격분했다. 오커스 때문에 호주와 맺었던 77조짜리 잠수함 건조 계약을 날렸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사전 언질조차 없었다며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반면 호주는 쿼드를 비롯한 거의 모든 대중국 견제 전선에 참여해 미국의 지원을 한몸에 받고 있다. 지정학과 의지가 더해진 결과이다.
돌이켜보면 트럼프 전 대통령 시대의 외교는 단순했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미국과의 관계를 고민하기보다는 트럼프 개인의 예측불가능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미국도 중국의 급부상처럼 동맹국들과 함께 대비해야 할 과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 때문에 바이든 시대 외교는 훨씬 더 복잡하고 급박해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며칠 전 유엔 총회 연설에서 ‘끈질긴(relentless)’ 외교를 하겠다고 했다. 중국이란 단어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모든 언어는 중국을 향하고 있었다. 바이든은 “치열하게 경쟁할 것이고 우리의 가치와 힘으로 이끌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끈질긴 외교’를 위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안보망을 겹겹으로 짜나가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인도·호주가 함께 하는 4국 연합체인 ‘쿼드(Quad)’를 출범시킨데 이어 오커스를 띄웠다. 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5개국 정보동맹인 ‘파이브 아이스(Five Eyes)’는 한국 등을 추가해 확대하려 하고 있다.
하원 군사위는 국방수권법 개정안에서 주한미군을 감축하지 못하게 했던 기존 조항을 삭제했다. 트럼프의 주한미군 감축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안전장치를 풀어버린 것이다. 바이든이 아시아에서 더 자유롭게 주한미군을 운용할 수 있게 문을 열어준 셈이다.미국의 이런 움직임은 당연히 중국의 대응을 부를 것이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한국은 이미 이 소용돌이 안에 있고, 이런 변화된 상황은 한국에 새로운 차원의 전략과 전술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임기 마지막 유엔 총회 연설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종전선언 얘기를 반복했다. 예전과 다른 설득력 있는 내용이 추가된 것도 아니었다. 문 대통령이 “북한 핵개발 계획이 전력질주하고 있다”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경고를 몰랐을 리 없다. 북한이 얼마나 집요하게 핵과 미사일 능력을 증강해왔는지, 미국과 중국이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채 기존 종전선언 논리를 반복하는 대통령의 현실 인식은 실망스러웠다. 문 대통령의 연설을 들은 국제사회는 종전선언에 대한 의지를 읽기보다는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지 못하는 한계를 감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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