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침공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일은 대중적 신뢰가 높았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적임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2003년 2월 5일 파월은 유엔에서 본인이 그토록 반대했고, 피하고 싶어했던 이라크 전쟁 연설을 했다.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갖도록 두는 것은 9·11 이후 세계가 선택할 일이 아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앞서 미 국무부는 유엔 안보리 입구에 걸려 있는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 태피스트리 위에 푸른색 커튼을 치도록 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의 작은 바스크족 마을로, 1937년 4월 히틀러가 독일 공군의 신형 고성능 소이탄을 시험했던 곳이다. 폭격으로 게르니카는 사흘 동안 불에 탔고 무려 1,600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 이 잔악 행위를 묘사한 작품이 피카소의 ‘게르니카’다. 미 정부는 전쟁반대 메시지가 강한 ‘게르니카’ 작품이 이라크 침공을 주장하는 내용의 TV회견을 하는 장면에서 뒷배경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파월 장관은 결국 ‘게르니카’를 푸른 천으로 가린 벽 앞에서 이라크전 회견을 해야 했다.
한 달 후 미군은 이라크 침공을 강행했다. 하지만 대량살상무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2년 뒤 장관직 사임 직후 파월은 ABC뉴스의 앵커 바바라 월터스에게 “내 기록에 영원히 오점으로 남을 것이며 역사에 그렇게 기록될 것이다”라면서 당시 유엔 연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소감을 밝혔다. 파월은 이후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후회하고 사과했다.
파월이 코로나19 합병증으로 10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주요 매체들은 그의 경력을 두 번의 이라크 전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합참의장으로서 1991년 걸프전을 지휘했다. 최소의 군사력을 단호하게 사용함으로써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2003년 이라크 전쟁은 정반대였다. 그의 억제된 군사력 이론은 ‘네오콘’들로부터 완전히 거부되었다. 전쟁을 정치하듯이 결정하는 민간인 안보전문가들인 네오콘들의 득세를 파월은 막지 못했다.
파월은 레이건 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가능한 한 무력 개입을 피하고 불가피할 경우 국민의 지지를 확인하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투입하라‘라는 안보지침, 즉 ‘파월 독트린’을 제시했다. 파월은 1995년 회고록에서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는 전쟁은 다시는 수행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결국 2003년 국무장관으로 이라크 전쟁을 치렀다. 본인은 네오콘들 사이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하지만, 그래도 더 반대의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콜린 파월’이란 이름은 그 자체로 미국의 위대함을 설명한다. 그의 삶엔 이민, 인종, 빈곤, 공교육 등 미국 시민사회의 이슈가 모두 녹아 있다. 그는 흑인이고 이민자의 아들이지만 슬럼가에서 공립학교 교육을 받았고 뉴욕 시립대학을 나와 결국 국가안보보좌관 합참의장 국무장관에 올랐다. 그래서 조지 부시 대통령은 그를 국무장관으로 지명하면서 “콜린 파월은 위대한 미국의 이야기다”라고 했다. 공화당원이지만 2008년에 오바마를 지지했고 2016년에 트럼프를 비판했다. 지난해 대선에선 유튜브로 바이든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파월은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예방전쟁’ ‘예고 없는 공격’을 운운할 때 긴장 완화를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네오콘의 핵심인 풀 울포위츠나 리처드 펄, 존 볼튼 등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한국쪽 파트너인 윤영관 외교부 장관과 함께 6자회담 방어벽을 만들어 냈다.
아쉽게도 파월은 이제 세상에 없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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